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지아 (문단 편집) == 결혼 == || [[파일:prunkbett_von_kaiserin_maria_theresia_original.jpg|width=100%]] || || 결혼 직후 만든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침대, 여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. || * 처음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상대자로 거론된 사람 중 한 명은 스페인의 [[카를로스 3세|카를로스 왕자]]였다.[* 1731년부터 [[파르마 공국]]을, 1735년부터는 [[나폴리 왕국]]과 [[시칠리아 왕국]]을 통치했고 1759년에는 [[스페인 국왕]] 카를로스 3세가 되지만 결혼이 논의되던 1725년 무렵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이 희박한 왕자에 불과했기 때문에, 큰 무리없는 혼인상대자로 고려되었다.] 다만, 카를로스 3세의 경우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겹사돈을 맺는다. 카를로스 3세의 5녀인 마리아 루이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 [[레오폴트 2세]]와 결혼하는데, 마리아 루이사의 셋째 남동생이자 카를로스 3세의 3남인 페르디난도와 레오폴트의 여동생 중 하나인 [[마리아 카롤리나]] 역시 부부가 되었다. * 당시 [[프로이센 왕국]]의 왕세자였으며 나중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[[프리드리히 대왕]]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청혼하면서 남편감으로 고려되었다. 실제로 카를 6세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었던 후보가 이 프리드리히였다.[* 카를 6세는 [[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]]로부터 프리드리히의 목숨을 보호해준 적이 있다.] 그러나 이 혼담은 무리가 많았다. 프리드리히 왕세자가 자신의 아버지인 [[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]]의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단적으로 청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. 실제로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프로이센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종교도 [[가톨릭]]으로 개종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대며 몸만 가도 된다고 간청했으나, 왕세자를 졸지에 종교도 다른 외국에 갖다 바쳐버리는 꼴이라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노발대발하며 반대하고 오스트리아의 국보급 장군인 [[사부아 공자 외젠]]도 이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성사되지 못했다. 프리드리히 2세는 일찍이 사촌인 영국 공주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오이겐의 추천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가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-베버른 공작 가문 출신 여성과 결혼한다.[* 물론 결혼이 성사되고 오스트리아-프로이센 연합이 결성된다 하더라도 그녀의 [[다혈질]] 성격에 얼마 못 가서 서로 싸우거나 프리드리히가 못 참고 나갈 상황이 있다.] *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1732년 빈에 유학 온 [[프란츠 1세|프랑수아 에티엔]][* 프란츠는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 [[부르봉 왕조]]의 방계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[[프랑스어]]를 모어로 하고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, 결혼하고 나서야 독일식 이름인 프란츠 슈테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.]과 사랑에 빠졌는데, 자기 전에 꿈에서 그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시녀들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당시 영국 대사는 기록하고 있다. 아버지 카를 6세도 로렌 가문이 합스부르크 왕가와 혈연이 있는데다[* 프랑수아의 할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라는 카를 6세의 할아버지 [[페르디난트 3세]]의 딸이다.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랑수아는 6촌이다.] 양가의 인연과 인품이나 지성이 쓸만하다고 여긴 프랑수아를 마음에 들어했고 로렌을 둘러싼 이해관계[* 로렌 가문은 [[카롤루스 대제|카를 대제]]의 후손으로 적당히 지체가 높고 로렌 공국 자체가 신성 로마 제국 영방에 속하면서도 프랑스 왕국 깊숙이 자리잡은 위치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킬 위험이 없었다. 거기에 로렌은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다.]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애가 맞물리면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(100%는 아니지만) 연애결혼을 했다.[* 프란츠의 아버지 로렌 공작 레오폴드는 프란츠의 형이 살아있을 때부터 후계자를 합스부르크 왕가에 장가 보내려는 시도를 했다. 사돈인 프랑스 왕실(레오폴드의 부인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프랑스 국왕 [[루이 14세]]의 조카)에서 경악해서 경고할 정도였다.] 단, 둘째 딸 마리아 안나와 프란츠의 동생 [[카를 알렉산더|샤를 알렉상드르]]와 겹사돈 맺는 것은 반대했다. 이 둘은 카를 6세가 죽고 나서야 결혼했다. 로렌의 프랑수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인 로렌을 포기해야 했는데, 그의 어머니[* 로렌 공작 레오폴트의 아내이자 프랑수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프랑스 국왕 [[루이 13세]]의 차남, [[필리프 1세(오를레앙)|오를레앙 공작 필리프]]의 딸이자 [[루이 14세]]의 조카인지라 완전한 [[프랑스인]]이었고 프랑스 왕국에게 해가 되는 결혼을 반대했다. 하지만 동생이던 [[카를 알렉산더|샤를 알렉상드르]]는 적극 찬성했다. [[겹사돈|그 이유는 본인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 마리아 안나와 연애 중이었다.]]]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고향을 포기하고 만다. 하지만 자신의 영지 로렌을 [[루이 15세]]의 장인인 전 폴란드-리투아니아 국왕 [[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|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]]에게 양도하고 대신 [[토스카나 대공국]]을 받는다는 조건의 서류를 보자 죄책감과 미련, 양심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주저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여러 번 펜대를 던졌지만 '''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때마다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던진 펜을 계속 주워다 주었고'''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